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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인생의 황혼길로 들어선다는 것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만강을 위하여!"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빠의 건배사네요.
이제 주말이면 한 두시간은
식탁에도 앉으실 수 있게 되셨거든요.
동생들과 아저씨와 우리 갑순이와
주말 저녁마다 조촐한 파티를 가장한 아빠 음식 먹이기 프로젝트가 진행됩니다.
젊을 적부터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들고
다 돌아오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서 건배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는데
아빠 표정이 왠지 슬프네요.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듯이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는거죠. 누구에게나 같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빠한테는 비껴갔으면 하는 어긋난 바램이 든답니다.
지난해 겨울 노쇠한 상태에서 암수술하고 너무나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온 아빠예요.
그렇게나 예뻐하는 손녀딸이 먹이는 음식도 못드시고 괴로워하시고
정신도 못차리고 누워만 계실 때는 눈만 떴으면 했죠.
기운 좀 차리시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밥을 못드셔서 영양주사를 일주일에 2~3회씩 맞고
아기 이유식이랑 경장영양제로 버텼더니
어느날 일어나 앉으시네요.
거의 넉달만에 집안을 살살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셨어요.
몸무게도 36키로에서 40까지 오르고요.
동생들도 매주 와서 아빠를 씻기고 먹이고 운동시키고 하니
눈에 띄게 좋아지고요.
아빠가 저희집 오셔서 처음엔 티비도 조명도 못 켜게 하고 종일 먼 산만 보고 눈도 안마주치고 생전 안하던 부정적 말씀들도 많이 하셔서 진짜 불안했죠.
우리 출근하고 없는 사이 무슨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운 나날이었어요.


요양보호사가 배치되면서 식사도움과 말벗이 생기게 되니 몸과 마음의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이젠 태블릿도 보시고 음악도 들으시고요.
그리고 거울도 보신답니다.
같이 온 강아지 갑순이도 간식은 줬는지, 산책은 했는지 챙기시네요.
우리 아저씨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배고플텐데 어서 저녁 들어야지!
하며 챙기고요.
기억력 감퇴 빼고는 소소한 일상적 대화도 가능하답니다.
여지껏
저랑 동생들은 아빠보고
더 드셔라!
더 회복해라!
더 움직여라!
오늘은 얼만큼 먹었냐!
거실 몇바퀴 돌았냐!
매번 대화가 이랬던거 같아요.
너무 긴 시간 동안 다들 힘겨웠으니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거죠.
그래서 더 아빠에게 회복 더해라!
더해라! 하는거예요.

매일 노트에 날짜를 적고 틈틈히 메모를 하시는 아빠!
기억력이 점점 감퇴해서
뭐든 잊지 않으려고 적으신대요.
어제는 아저씨랑 오랜만에 식탁에서 저녁 먹으며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은 이제 인생의 황혼길로 들어서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더 이상의 회복은 없다고!
이제 아픈데도 없고
그저 노쇠해지는 현상인거고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이 준
당신의 길이니까 순리대로 살다가 죽는거라고요.
고향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요.
더 큰 회복을 기다리면서 미루면
때는 이미 늦어버린다고요.
속으로 울었습니다.
백번 천번 맞는 말입니다.
아빠를 청년처럼 회춘시키려고 맘 먹었던 제가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더라고요.
아빠는 아빠에게 주어진 본인의 인생을 추호의 거스름도 없이 가려고 하시는거죠.
마지막 그 인생의 황혼길을
편안히 가실 수 있도록 저랑 우리 아저씨가 곁에 있을거예요.
아빠랑 함께 더 늦기 전에 아빠의 어린 시절 고향 동네에 다녀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