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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할머니의 재봉틀

지난 연휴에 딸과 함께 제 외할머니댁을 다녀왔었거든요.
우리 할머니!
증손녀가 입고 온 바지를 유심히 보십니다.

요건 제 외할머니가 젊을 적부터 가지고 계시던 애지중지 재봉틀이에요.

당신의 증손녀 바지 단에 올이 풀려 있는것이 눈에 거슬렸나봐요.
스르륵! 어느새 나와 있는 재봉틀!

왜 요즘 젊은 사람들 패션 보면 바짓단을 가위로 싹뚝 잘라서 올이 머리카락처럼 풀린 채로 입는 그런 바지 있잖아요?

증손녀를 살살 구슬리는 할머니!
바지가 보기 싫다고!
그렇게 입으면 못 쓴다고!
당신이 예쁘게 고쳐준대요.ㅋㅋㅋ

순간 우리 딸이랑 저랑 눈이 마주쳤죠.
울 할머니 한 번 맘 먹으면 물러서지 않으시거든요.

잠깐동안 망설이던 증손녀!
"네 고쳐주세요!" 쿨하게 오케이!

할머니는 실오라기 복슬복슬을 다 잘라버리고는 손바느질로 대충 바지단의 모양을 낸 뒤 재봉틀로 박을 준비 하십니다.

본격적인 재봉틀 솜씨 발휘에 들어가시네요.

젊어서 이 재봉틀로 한복을 만들어서 먹고 살았던 적이 있대요.
재봉틀 하시면서 젊을 때 얘기 들려주는거 듣는게 저는 너무너무 재밌어요.

하루에 한복을 예닐곱벌씩 만드느라고 우리 엄마를 할머니 시댁인 포천에 오랫동안 맡기곤 하셨대요.
한번 씩 보러가면 엄마 따라 집에 온다고 치맛자락 붙잡고 우는거 떼어 놓고 뒤돌아서 오시면서 할머니도 울고 왔다고...
우리 엄마는 저 젊을 때 먼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이런 얘기는 할머니 아니면 들을 수도 없죠.

가슴팍에 바늘도 척 꽂으시고 언제라도 손 볼 수 있게 스탠바이 해 놓으셨네요.

우리 딸래미의 최첨단 패션 바지는 이렇게 재봉틀로 돌돌돌 얌전해지는 중이예요.

울 할머니의 눈에는 "멋은 개뿔!"이죠.
바지 밑단에 치렁거리는 실오라기들은 할머니한테
다 죽어쓰! ㅋㅋㅋㅋ

전 불행하게도 바느질에는 취미가 없어서 몰랐는데 재봉틀은 가느다란 실을 바늘 귀에 직접 끼워야 하더라고요.

요기 뒷편에 이렇게 커다란 실통이 세워져 있고 이 실을 끼워서 사용하는거예요.

그리고 재봉틀 바늘 밑에는 씨실통이 작은 것이 들어 있어서 이 실과 바늘에 들어있는 실이 서로 같이 바느질이 되는 것이죠.

날실과 씨실로 바느질이 완성 되는건데

저도 벌써 눈이 침침한 중년인데 울 할머니는 돋보기 쓰고 손도 떨지 않고 단번에 바늘에 실을 꿰세요.
우와! 신기방기!

 드르륵드르륵! 소리도 경쾌합니다.
요 재봉틀로 저는 어릴적부터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을 입었었고요.
그동안 원피스 치마 바지 코트 스카프 같은 것도 만들어 주셨거든요.

자식에 손주 옷에 이제는 증손주 옷까지 손수 봐주시는 할머니!
진짜 정정하시죠?

그래도 혹시나 우리 딸래미의 스타일이 망가졌을지 몰라 내심 맘에 쓰였는데 딸 말이
"안그래도 빨래할 때마다 점점 더 올이 풀려서 바지를 버려야 하나 했었는데 잘 됬어요"
이러네요.
입어 보더니 맘에 쏙 든대요!
제가 보기엔 할머니 맘에 더 쏙 드신듯요.!

뒷정리도 바로바로!
이번에 이사하시면서 당신 방에 재봉틀을 위한 수납장을 따로 주문제작까지 하셨더라고요.

재봉틀도 보관하고 밑에 서랍장에는 재봉용품을 담는거예요.
할머니의 인생만큼 함께 해 온 재봉틀!
건강하셔서 앞으로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제 옷들 주욱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여름에도 할머니 앞으로 나온 재난 지원금으로 동대문가서 인견을 끊어다가 집안 내 남자분들 것 파자마를 만들어서 돌리셨답니다.
울 아저씨도 수혜자 중 1인 이었죠.
풍덩풍덩하고 시원하다고 고것만 입고 자려고 하더라고요.

90이 넘으신 할머니의 인생이 담긴 재봉틀!
저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재봉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