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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하얀 거짓말 라떼 육아일기1

20여 년 전 아빠라는 사람들에게 일과 육아의 밸런스는 아주 드물었고 진귀하기까지 했죠.
그 시대 그 사회에서는 용납되기가 힘들었으니까요.

집안 내에서도 '아버지'는 경제적 책임만 지면 부모의 책무에 있어서 크게 저하되지 않았고 육아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어린 자녀를 둔 아빠들은 나이대가 젊고 한창 일할 나이니까 늘 바쁘고
잔업에 야근도 많고
거기에 주말 출근도 허다했던 것이 사실이예요.

엄마인 저도 일을 하고 있었으니 지금 5~60대 분들은 그 당시 저희 가정 생활 패턴이 어땠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실거예요.

아저씨 회사는 집과 꽤 거리가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밀리기 전 새벽에 나갔고 늦은 밤에야 돌아왔죠.

딸의 초등시절은
학교 끝나면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피아노 학원으로 피아노 학원에서 태권도 학원으로 태권도 차를 타고
맨 마지막에 내려서 집에 들어와야만
저랑 퇴근시간이 맞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초등5학년까지 했네요.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한 마음이 커요.

어찌되었든지간에 저랑은 아침 저녁에 잠깐이라도 만날 수가 있는데 문제는 아빠였어요.
유치원 다닐 때 아이는 늘 아빠를 그리워했지만 아빠를 볼 시간이 없었다는 거죠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아이의 관심이 아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보였어요.
아빠는 일요일에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일 뿐더러 늘 주중의 피로가 누적되어 잠자고 있는 모습만 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즈음 어느 아동학과 교수의 인터뷰를 하나 접하게 되었는데 아이가 아빠와의 유대가 깊게 형성되지 않으면 자신감이 결여된 채 자라기 쉽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아빠하고의 대화가 어색하기도 한 것 같고, 아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엄마가 말해주면 안 돼?"하고 저를 자꾸 중간에 끼우더라고요.

현실은 금방 달라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묘수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얀 거짓말!"

자고 일어나면 딸아이는 늘 이렇게 물었거든요.
"엄마! 아빠는?"
"아빠? 회사 가셨지. 우리 ㅇㅇ 이 볼에 뽀뽀해주고 잘 갔다 온다고 말하고 갔는데 자느라고 못 들었구나?"
"아빠가 그랬어?"
이런 식으로 '네가 자고 있을 때도 아빠는 너랑 교감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었어요.

아저씨랑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을 더 갖자고 얘기했어요.

어쩌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집 앞 순댓국집에 가서 함께 밥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아이가 아빠를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거예요.
식당까지 가는 길에 아빠와 손을 꼭 잡고 스키핑으로 걸어가는 딸을 바라보는 게 저도 너무 흐믓했고요.

그 당시 유치원에 재롱잔치라는 행사가 있었거든요.
겨울에 하는데 딸이 웬일로
자기 아빠가 꼭 왔으면 좋겠다고 조르는거예요.
생전 조르거나 떼쓰는 일이 없던 아이가 하는 말이라 저도 아저씨도 깜짝 놀랐죠.
"아빠가 시간 내서 꼭 갈게"
하지만 아저씨는 그 날 오지 못했어요.
행사 끝나고 집에 오는데
"엄마! 아빠는? 아빠가 나 하는 거 봤어?"
"그럼 보셨지. 너 신데렐라 뮤지컬 때 아빠가 맨 뒤에서 너 보면서 손 흔들었잖아.
못 봤어?"
"아! 진짜? 나는 앞이 깜깜해서 잘 안보였어"
"그랬구나 아빠가 바바리 코트 입고 뒤에 서 있었어. 그거 보고 가셨지. 너 엄청 잘했다던데?"
"정말?"
아이는 다 클 때까지 그때 아빠가 왔다간 걸로 기억하고 있었대요.

아이가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않게 하려고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노력했고 또 함께 하려고 노력했었던거 같아요.
다행히 딸은 아빠의 부재를 느끼지 않고 밝고 맑게 잘 자라주었답니다.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죠.

요즘 육아휴직이다, 출산 휴가다 해서 아빠들에게도 육아의 권리가 보장되잖아요.
또 주말이 있는 삶이 당연시 되다 보니 육아는 엄마 아빠가 함께 하면서 아이와의 유대도 쌓고
그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교류도 가질 수 있을테니 참 좋을거 같아요.

라떼 육아를 돌아보며 드는 생각은 육아는 시간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의 질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다 커서 독립한 아이를 보면서 가끔 육아 초보시절의 우리 부부의 우왕좌왕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끄적거려 봤네요.